
자기의심의 목적은 자기 객관성의 확보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자기의심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인지하고자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고, 사전 질문의 형태나 제한이 없는 테스트일수록 그 능력이 더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혹은 해야만 하는) 상황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한참 달려나가도 부족한 상황에서 가만히 한 자리에 멈춰서서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가? (혹은 효율적인 길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당히 커다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자기의심은 환영받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감을 갑옷처럼 둘러야 다른 사람들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신경쓰지 않는채로 자신의 안위와 편안함만 쫓는다면, 어느샌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별개로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므로, 어느정도의 자기 객관화는 필요불가 한 것이다. 다만,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얼마만큼의 강도로 얼마나 자주 자기자신을 의심하느냐 라는 디테일이 관건이겠지만.
자기의심. 자기객관화 등은 각기 모호한 단어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엄격한 의의나 절차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겠으나 대체로 심리학 분야에서는 자기객관화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탈중심화(Decentering)
스스로의 감정과 느낌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느낌과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애초에 이 단계가 없으면, 자기의심이 시작조차 될 수 없다.메타인지(Metacognition)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자기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소위 자기객관화가 여기에 속하게 된다.수용(Acceptance)
인지한 사실을 토대로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수용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논리적 오류에 빠지게 되면, 결국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영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기 쉽다.
운전으로 비유하면,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인식한다(탈중심화)
표지판을 찾아보거나, 지도를 보고, 정확한 내 위치를 인식한다(메타인지)
목적지를 향해 경로를 수정하거나, 돌아가거나 혹은 목적지를 변경 한다. (수용)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재밌는 건, 석가모니께서도 경전에서 이와 같은 자기 객관화를 아주 중요한 요소로 설법하셨다는 점이다.

소위 여실지견(如實知見)은 팔정도(八正道)의 여덟 가지 요소 중 첫 번째이자 가장 바탕이 되는 정견(正見)에 대해 설파하셨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세상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 관념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정견은 팔정도의 나머지 일곱 가지 수행을 올바르게 이끄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애초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스스로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시도조차 무의미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 ‘나침반’을 자신의 욕망에 맡기고, 또 어떤 이들은 ‘권력’이나 혹은 ‘생존’이나 ‘종교적 희열’로 치환하곤 한다. 본인이 스스로를 죽을 날까지 기만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정견은 단지 앎에서 오지 않는다고 보셨다. 석가모니께서 생각하시기에 정견은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일종의 상태에 가까운 것이기에 소위 사념처(Satipaṭṭhāna) 수행을 통해 거기에 가닿을 수 있다고 설법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 《맛지마 니까야》, '마음챙김의 확립 경(Satipaṭṭhāna Sutta)
여기서 사념처는 다음과 같다.
신(身): 몸의 움직임과 호흡을 관찰함.
수(受):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감지함.
심(心):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인식함.
법(法):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원리와 법칙을 관찰함.
이는 심리학에 있어서의 심리학과 거의 흡사하다.
현대심리학이나 석가모니께서 설법하신 상좌부 불교등도 결국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찌보자면, 같은 대상을 다루는 두 영역이 흡사한 것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설법하신 것을 현대 심리학에 대입해보자면,
사마타(탈중앙화)를 통해, 사티[사념처(메타인지)]에 머물고, 결국, 이를 통해 현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 즉, 지혜에 해당하는 위빠사나(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설법하셨다.
그리고 위와 같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범재인 우리들에게 대입해보자면, “내가 무언가를 인지하고자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은 스스로가 갖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 잘못된 길(뇌파검사)에 빠졌다고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잘못된 길을 걷게된 연유는 무엇일가?
석가모니께서 설법하신 관점에 의하면,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소위 나의 '인지 능력의 탁월함'을 '나'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이 '우월한 나'라는 상(相)에 집착했기에, ‘나’의 능력이 조금만 흔들려도 곧바로 '치매인가?' 하는 극단적인 공포로 추락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나의 능력’을 '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았기 때문에 발생한 비객관적 공포에 해당되지 않을까?
만약, ‘똑똑하고 우월한 나' 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공부, 집중)에 따라 변하는 것임을 이해했다면, "능력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내 조건의 산물이다"라고 생각에 가닿을 것이고, 평소 나의 지적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여기서 지적 능력을 ‘육체 능력’이나 인간성 혹은 ‘관계’로 바꿔도 마찬가지가 적용될 것이다. 중요한 건, ‘지적능력’에 대한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지적 능력’에 대한 깨달음을 메타인지(뇌파검사)를 거쳐 수용(닦고 조이고 기름치자)하는 것에 대한 프로세스를 깨닫고, 잠재적으로 자기의심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다른 스스로애 대한 우월한 상(相)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찰(사마타)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바른견해(正見)를 얻는게 중요하다.
연못의 흙탕물 속에서 물을 탁하게 만드는 물고기 하나를 잡았다고 해도 모든 물고기를 잡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에 빠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석가모니께서는 이에 대해서도 좋은 조언을 해주신 바 있다.
"물이 흙탕물일 때 억지로 맑게 하려 하지 마라. 가만히 두면(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맑아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화가 나거나 혼란스러울 때 억지로 진정시키려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마음의 흙탕물(번뇌)은 스스로 가라앉고 맑은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의 사고작용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모든 현상은 흙탕물에 의해 오염 될 것이다.
현상에 자신의 상(相)을 대입하는 것이 먼저고, 현상을 파악하는 건 그 다음이다.
바다의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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