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조롱하는가?
비교를 멈추려 하지 말고, 비교가 일어나는 것을 알라
나는 <호프>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칸에서 기립박수를 7분간 쳤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을 때 부터 였다.
폭소에 기립박수 7분…칸 ‘호프’로 가득찼다.
중앙일보 2026.05.19 00:02
나는 SF를 사랑하고, 괴수 또한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봉준호의 <괴물> 이후, 봄직한 영화가 없었던 내게 있어서 외계인이 나오고, 괴물이 나온다고 하는 <호프>는 오래간만에 기다려봄직한 대박의 느낌 이었다.
그러나, 개봉일이 가까워지며, 시사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게 동조 압력에 맞서 일부러 관심을 잃은 척하려는 심리적 반발이었는지 혹은 관람에 따른 기대효용이 줄어듬에 따라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지간 <호프>라는 영화가 내가 기대하던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사람들이 "개연성이 없다", "CG가 이상하다", "말이 안 된다." 같은 이유만으로 작품 전체를 재단하는 태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줄거리만이 아니라 경험이고, 감정이며,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꿈처럼 파편적인 작품을 사랑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예시로 블레이드 러너는 오늘날에는 SF의 명작으로 취급하지만, 82년 개봉 당시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실패했었다.

원래라면,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삼가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
다시말해, 군중이 하나의 명분을 얻으면 생각보다 조롱을 먼저 선택하는 모습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 이었다. 영화에 대한 "나와 다른 평가"가 아니라, 자기 경험보다 분위기를 먼저 소비하는 태도에 대해 실증을 느낀 것 이겠지.
그건 아마 영화 하나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경험했던 어떤 감각이 이 영화를 계기로 다시 올라온 것에 가까운 것 이리라.
그러나, 문제는 그 답답함이 점점 커지면서, 너 역시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버렸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저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경험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이다.'
이렇게 나누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이름은 만(慢)이다.
(초기)불교에는 만(慢, 팔리어·산스크리트어 māna)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는 '거만함, 자만심, 오만함'을 뜻하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여 높이 평가하는 왜곡된 마음의 작용을 일컫는데, 초기불교 경전인 니까야에서는 이를 중생을 윤회의 삶에 묶어두는 10가지 족쇄(samyojana)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만(慢)또한, 더 세분화하여 칠만(七慢)으로 설명하고 있으시다.
만(慢): 동등한 자를 동등하다고 하거나, 뛰어난 자를 못하다고 여기며 거만함.
과만(過慢): 동등한 자를 자신보다 못하다고 하거나, 뛰어난 자를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며 거만함.
만과만(慢過慢): 뛰어난 자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거만함.
아만(我慢): 오온(五蘊)을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일으키는 자만.
증상만(增上慢): 아직 깨달음이나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이미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비만(卑慢):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 앞에서 조금 못하다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듯하면서도 내심 자존심을 세우는 교만.
사만(邪慢): 덕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덕이 있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교만.
흥미로운 것은 불교에서는 '내가 더 낫다', '나 또한 (그들과) 같다', '나는 (그들보다) 못하다' 를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즉 비교가 만(慢)의 근본이다.
재밌는 것은, 비교는 꼭 나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시작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다.'
'이 사람들은 수준이 낮다.'
'저들은 경험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결국 마음은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 자리의 이면에는 늘 '내'가 그림자 속에 서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괴로움을 하나 더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요즘 사람들은 영화를 경험할 줄 모른다."는 생각을 반복해서 품는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단순히 타인의 감상에 대한 불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다보면,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반대편에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나'라는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사람들의 감상이 달라질 때마다 나의 안목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누군가 작품을 조롱하면 마치 나 자신이 조롱당하는 듯한 불쾌감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타인을 평가하는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그 평가는 나를 지키기 위한 문제가 되어 버리게 된다.
불교에서 만(慢)을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교는 단순히 상대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비교는 반드시 '나'를 세우고, 그 '나'를 지켜야 한다는 또 하나의 집착을 낳으며, 결국 스스로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 더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교를 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할까?
재밌는 건, 불교에서는 비교하지 말라고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인식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바로 관(觀,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팔리어 Vipassanā)이다.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지금 누군가를 높이고 있구나.'
'지금 누군가를 낮추고 있구나.'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나라는 자리가 함께 만들어지고 있구나.'
소위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비교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수행해야 할 재료가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비교의 대상이 사라질 때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일으키는 '나'라는 감각이 희미해질수록 비교 또한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우리 삶이 무상해서 서로간의 차이가 없다. 뭐 이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은 불공평하다. 우리의 생은 비대칭이다. 어떤 이는 지혜롭고, 어떤 이는 어리석으며, 어떤 이는 자애가 깊고, 어떤 이는 타인과 자신을 상처 입히고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다만,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높고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조건 속에서 드러난 법(法)의 차이라고 바라본다.
즉, 어떤 이가 지혜로운 것도 그가 가진 고정된 본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그렇게 작용한 결과이다. 지혜가 많은 것은 지혜라는 법이 많이 드러난 것이고, 탐욕이 많은 것은 탐욕이라는 법이 강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는 그가 자라온 교육, 습관, 환경, 수행, 만남, 누적된 마음의 경향이 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만든 것이기에 불교의 관점에서는 “저 사람은 본질적으로 높다”라고 보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조건이 어떤 법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법을 보는 대신 사람을 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 사람은 수준이 낮다.'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저 사람은 저급하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한 사람을 평가하는 동시에, 그 맞은편 어딘가에 조용히 자기 자신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비교는 언제나 둘을 만든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깨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 수행은 마음을 쪼개어 둘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일이다. 자유란 비교의 대상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비교가 일어나더라도 더 이상 그 생각을 붙잡지 않는 마음일지도 모르기에.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배열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게 우리가 가야할 하나의 방향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바다의 쥐!
댓글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