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너 리뷰 갤러리'를 통해 본 사회인류학
문화컨텐츠를 가장한 사회에 대한 마이너한 분석, 그 안에서 끄집어낸 소외된 사회문제.
네가 유튜브를 그렇게까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엊그제 우리가 나눴던 대화 이후, 나는 너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명 ‘베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 사회가 터부시해온 문제들, 그리고 그 안에서 실제로 우리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대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서 의견이 크게 충돌할 때마다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아마 서로의 생각을 객관화해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베타’에서 나누었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베타’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너와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깊이와 방향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그래서 이 채널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채널의 운영자는 익명 뒤에 숨어 자신의 경험 하나만으로 사회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쉽게 꺼내지 못하는 주제를 다룬 콘텐츠를 통해 사회를 비춘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비교적 정제된 언어로 토론할 수 있게 만든다. 정답을 제시하거나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그것을 구조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 인간이 성장하며 겪은 경험들이 사회의 어떤 좌표 위에 놓여 있는지를 제시하고, 그곳에서 다시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 점에서 이 채널은 가치가 있지.
속칭 마리갤은 만화,웹툰,영화,인터넷 밈 같은 걸 소개하는 리뷰 채널의 외형을 갖고 있지만, 실제 핵심 주제는 다음 문장으로 압축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사랑,가족,성별,계급이라는 구조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인정받지 못한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
이 채널은 인간을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단순하게 판정하지 않는다.
사랑받고 싶지만 거절당할까 두려워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존재,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신을 규정해줄 집단과 서사를 찾는 존재, 사회구조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전가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그것을 도덕,사랑,가족,정체성이라는 언어로 포장하는 존재. 그러면서도 실패와 열등감 속에서 사랑하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스꽝스럽고도 존엄한 존재.
그것이 이 채널이 바라보는 인간에 가깝다고 여겼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기 전에 ‘욕망을 배우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은 순수하게 개인에게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대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조차도 타인이 부러워하는 외모, 연애, 직업, 가족, 성취를 바라보며 그것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 자체보다도, 어쩌면 “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더 원하는지도 모른다.
연애와 결혼에서도 사랑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바이러스처럼 관계 안으로 침투한다.
나는 이 시장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가.
상대는 나를 선택함으로써 무엇을 증명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관계를 부러워하는가.
나는 과거의 실패를 이 관계를 통해 만회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사랑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온다.
마리갤이 NTR, 레드필, 설거지론, 외모 강박 같은 주제를 계속 다루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성적 취향이나 젠더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결국 “나는 타인보다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인정투쟁이 반복된다.
우리가 시선을 두어야 할 곳도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채널이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것도 단순한 위선이라기보다 ‘자기기만’에 가깝다.
너도 알다시피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곧이곧대로 말하기 어려워한다.
사랑받고 싶다.
예쁜 사람에게 선택받고 싶다.
돈과 지위를 갖고 싶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다.
실패한 내 인생을 누군가가 보상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이런 감정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욕망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다른 언어로 위장한다.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은 “요즘 남자와 여자는 문제가 많다”는 말로 바뀐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외모만 보는 사회가 타락했다”는 말로, 성적인 질투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관계”라는 말로 바뀐다.
계급적 박탈감은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부정하다”는 확신으로 변하고,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그래도 가족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말 속에 감춰진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정치,젠더,정체성 집단에 대한 과도한 몰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채널은 사람의 발언 그 자체보다, 그 발언을 필요로 만들어낸 ‘결핍’에 집요하게 관심을 둔다.
우리가 그나마 ‘베타’를 통해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감정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꺼내놓고 이야기해온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채널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인간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이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학력이 낮고,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면책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살아온 비참한 조건까지 지워버려서도 안 된다.
‘저지능, 저학력에 가족에게도 버려진 여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울한 중졸 무직 패배자도 밥을 먹고 산다.’
‘비정규직 패배자 청년이 음모론자를 만나면 생기는 일.’
‘요즘 애들이 도전하지 않는 진짜 이유.’
이런 영상들에서 채널은 그들을 시답잖게 영웅화하지 않는다. 사회가 이미 실패자로 분류한 사람들의 비루한 일상을 끝까지 바라볼 뿐이다.
그 안에는 “인간의 존엄은 성공 여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있다.
나는 ‘실패’를 다룬 영상들을 보면서 우리가 자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성공담은 결과를 기준으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한다. 반면 실패담은 인간의 욕망과 허영, 착각과 집착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패배는 인간의 열등감과 원한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인간에게 ‘멋’과 품격이 생기기도 한다.
마리갤이 말하는 성숙은 승리하는 능력보다 “자신의 실패를 남 탓과 혐오만으로 처리하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
나는 그런 삶의 태도와 시각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때로는 ‘여유’라는 단어로 너에게 강요했던 시간도 꽤 길었던 것 같다.
그것이 우리 삶을 건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며, 일종의 멘탈 근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이 채널의 관점도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남긴다.
가족은 인간을 보호하는 최초의 공동체이면서, 인간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최초의 권력기관이다.
마리갤은 가족을 무조건 따뜻한 공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드시 해체해야 하는 억압체계로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가족은 사랑과 폭력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장소다.
부모의 사랑도 반드시 선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녀를 자신의 실패를 보상할 도구로 보는 것, 자신이 희생했으니 자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자녀가 자신과 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자녀의 선택권을 빼앗고, 자녀에게 배우자·상담자·보호자의 역할까지 떠넘기는 것.
그것들은 노골적인 학대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분명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머니 역시 사랑과 혐오, 헌신과 도피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가진 인간이다. 자녀도 부모에게 감사와 원망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은 때로 부채가 되기도 한다.
내가 너를 낳았다.
내가 너를 먹여 살렸다.
내가 너 때문에 희생했다.
그러니 너는 내 기대에 맞게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부채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자녀는 평생 갚지 못했다고 느끼고, 부모는 평생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노골적으로 나쁜 가족보다 모두가 착하고 희생적인 가족에서 오히려 죄책감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가족의 파괴가 한 인간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가족은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누구의 자녀이고 형제인지, 내가 실패하기 전 어떤 꿈을 가졌는지,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감각을 보관하는 기억장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족 문제는 계급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족은 갈등을 완충할 수 있다. 자녀가 독립할 집을 마련해줄 수도 있고, 치료와 상담을 받게 할 수도 있으며, 돌봄을 외부에 맡길 수도 있다. 실패한 자녀에게 다시 도전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반면 가난한 가족에서는 사랑과 생존이 직접 충돌한다. 한 사람의 중독,질병,실업이 가족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주제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수십, 수백 가지에 이른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야기했지만 끝내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처럼.
남성과 여성의 갈등 역시 단순히 두 성별의 본성이 충돌한 결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연애와 결혼을 극단적인 평가시장으로 만들었다.
남녀 모두 외모와 나이, 소득과 직업, 학력과 집안, 성 경험, 사회성, 정서적 안정성, 미래의 돌봄과 부양 가능성으로 평가받는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만남은 보통 시장에서 시작한다.
그 결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찾는다. 자신이 완전히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남성은 레드필·설거지론·도태남 담론으로 이동하고, 여성은 가부장제·여성혐오·외모 권력 담론으로 이동할 수 있다.
두 설명은 서로 적대적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구조의 피해자”라는 심리적 기능에서는 서로 닮아 있다.
채널이 포착하는 남성의 공포는 “아무도 나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각이다.
돈을 벌어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여성을 보호하고 만족시켜야 한다. 그리고 성적으로도 선택받아야 한다.
여기에 실패하면 단순히 연애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성성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기 쉽다.
그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하면 여성혐오, 과거의 여성에 대한 집착, 성공한 남성에 대한 질투, 음모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린다.
마리갤은 이런 모습을 조롱하면서도 묻는다.
왜 일부 남성에게는 이런 세계관이 필요해졌는가.
여성이 겪는 문제는 사랑받는 것과 소비되는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 외모와 젊음은 강력한 자원이 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아름답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아름다우면 대상화된다.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비난받고, 드러내지 않으면 매력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결혼하면 개인의 이름과 경력이 가족 안의 역할로 흡수되고, 결혼하지 않으면 실패했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여성은 권력을 갖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질투와 남성 욕망이 투사되는 대상이 된다.
이 채널은 여성의 구조적인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의 고통을 여성 특권론 하나로 설명하지 않는다. 여성의 모든 선택을 해방으로 미화하지도 않고, 성적 자유가 반드시 약자의 자유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새로운 도덕적 권력이 될 가능성 역시 경계한다.
결국 상대 성별 전체를 하나의 인격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 자신의 욕망과 상처를 정치적 구호로만 포장하지 않는 것, 관계 속에 사랑과 거래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선택받지 못한 수치심을 혐오로 바꾸지 않고, 상대를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역할의 수행자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
마리갤이 말하는 사랑은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상대를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가 무척 많다고 생각한다.
이 채널이 다루는 계급 역시 단순히 돈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득·집·부모의 재산·고용 안정성과 같은 경제자본뿐 아니라 학력·언어·취향·교양 같은 문화자본도 있다. 얼굴·몸·나이·패션으로 만들어지는 외모자본, 가족·친구·연인·인맥으로 형성되는 관계자본도 존재한다. 지능·정보해석력·자기통제 같은 인지자본, 안정적인 애착·자존감·실패 회복력 같은 정서자본, 연애시장에서의 매력과 선택 가능성이라는 성적 자본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것만이 가난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것, 실패했을 때 붙잡아줄 가족이 없는 것, 도움을 청할 관계가 없는 것도 가난이다.
현대 계급의 잔혹함은 실패를 개인의 책임처럼 보이게 한다는 데 있다.
공부하면 올라갈 수 있고, 노력하면 취업할 수 있으며, 관리하면 예뻐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격을 고치면 연애할 수 있고, 투자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실패한 사람은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구조적인 불평등이 자기혐오로 내면화되는 것이다.
안전망이 있는 사람에게 실패는 경험이다. 하지만 안전망이 없는 사람에게 실패는 추락이다. 연애도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상당 부분 계급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비슷한 교육 수준과 생활권에서 만나고, 외모를 관리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안정적인 주거와 직업이 있어야 관계를 유지하기 쉽고, 가난과 가족부양 문제는 결혼의 가능성을 낮춘다.
그런데 실패한 남녀는 서로 연대하기보다 상대 성별을 원망한다.
남녀갈등이 격렬해질수록 실제 경제적 불평등은 가려진다. 주거·고용·돌봄의 문제가 성별 간의 도덕성 경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 인터넷 공동체는 세 가지를 제공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실패한 이유에 대한 설명.
그리고 내가 미워해도 되는 대상.
일베, 디시식 패배자 문화, 레드필, 음모론,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가 힘을 얻는 구조다.
이 채널은 온라인 혐오를 단순히 무지한 사람들의 악행으로만 처리하지 않는다. 그런 세계관이 고립된 사람에게 소속감과 설명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강력하다고 바라본다.
다만 상처가 혐오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선을 유지한다.
그 점이 내가 이 채널을 계속 보는 이유일 것이다.
현대인은 과거보다 자유로워졌지만, 그만큼 실패의 책임도 혼자 감당하게 됐다.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는 약해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안전망은 충분히 생기지 않았다.
개인은 연애,취업,외모,SNS,자기계발 시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에 실패하면 구조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혐오를 견디지 못할 때 다른 성별, 다른 세대, 다른 계급, 다른 정치집단을 적으로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마리갤의 가장 중요한 윤리는 다음 문장에 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는 것도, 손쉽게 악인으로 판결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채널은 기이하고 불쾌하며 실패한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들의 욕망을 해부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조롱하지만, 마지막에는 그들도 결국 사랑받고 싶었고 자기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했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상의 정서는 냉소로 시작해 연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극적인 제목과 밈, 조롱으로 시작해 인물의 모순과 추함을 해부한다. 그리고 그 모순이 생겨난 가족·사회·계급적 배경을 보여준다. 끝내 면죄부를 주지는 않지만, 그 사람을 한 인간으로 이해할 여지는 남겨둔다.
마리갤의 독특함은 바로 이 ‘잔인한 연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채널은 잔혹할 정도로 외모,성,가족,계급을 노골적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우리의 ‘베타’처럼 그것을 전시하고, 서로 연결한 뒤 다시 분석한다.
조롱과 유머를 이용해 무거운 주제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면서도, 실패한 인간에게 촛불 하나 정도의 서사와 존엄을 남겨놓는다.
이 채널을 통해서는 병리적이고 극단적인 주제가 많아 인간관계 전체가 실제보다 더 어둡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의 심리를 사회 전체의 경향으로 무리하게 확장하지만 않는다면, 균형을 유지하며 소비하기에 좋은 인문학적 교보재라고 생각한다. 화면에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상처와 균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 상처가 다시 배척과 조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간성을 향한 설득일 것이다.
결국 이 채널의 세계관은 냉소주의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냉소주의는 아니다.
인간을 낭만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인간이 왜 추해졌는지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이 채널을 네게 소개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그동안 나눠왔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 서로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놓고 싶어서다.
이 채널의 이야기에 모두 동의해달라는 뜻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저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과 가족, 남성과 여성, 사랑과 계급에 관해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를 설득하는 것보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보았고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조금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일을 정말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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